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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1997) & <붉은 돼지>(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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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 <붉은 돼지>는 전쟁에 대한 반대  -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전쟁에 대한 반대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공존 

* <붉은 돼지, Crimson Pig>(1992) - 전쟁에 대한 반대 

 

* <모노노케 히메, The Princess Mononoke>(1997) - 인간과 자연의 공존(共存) 

인간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지만 조금 더 윤택한 삶을 추구하며 방해가 되는 것은 없애려고만 한다. 게다가 에보시가 들개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들개들이 타타라 마을에 사는 여자들의 남편을 죽였기 때문에 원한을 갚는 것이라는 이유로 정당성을 주장한다. 또한 신 역시 신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신의 터전을 훼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들의 입장을 고수하고 인간 자체를 증오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같은 입장 차는 서로에 대한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보시가 들개의 도움을 받아 마을로 돌아오게 되면서 협동 관계가 형성되어 공존 가능성을 제시한다.

모노노케 히메

장르: 애니메이션, 액션, 어드벤처, 드라마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원작: 미야자키 하야오

개봉일: 일본 1997년 7월 12일

한국 2003년 4월 25일

상영시간: 135분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한 애니메이션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역대 최고 작품 중 하나로 평가되는 애니메이션이다.

구상 시간에만 16년 제작 기간은 3년 예산이 무려 200억 원이 들어간 대작이다.

97년 7월에 개봉해서 98년 7월까지 1년 동안 극장에서 상영해서

최장기간 상영작품이 되었고 일본 내에서만 1420만 명이라는 관객이 있었던 전설적인 작품.

줄거리

거대한 신이 존재했던 아주 먼 옛날 인간들은 산을 망가뜨리고 산의 주인이었던 신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터전을 가꾼다. 그러자 인간들과 산에 살던 생물들의 싸움이 점점 거세지는 와중에

들개의 딸 모노노케 히메는 신들의 편에 서서 인간들과 맞서 싸운다.

인간들과 이런 싸움들 때문에 저주에 걸린 아시타카는 신과 동물들과 인간들이 함께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영역을 지키는 데만 급급하다.

그러다 인간들은 결국 사슴신을 죽이면서 많은 희생을 치른다 그제서야 새로운 생명들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다.

해석

우선 제목인 모노노케 히메의 뜻을 살펴보면

모노노케: 괴물, 요괴

히메: 공주라는 뜻인데

괴물들 요괴들의 공주, 한국으로 따지면 구미호? 도깨비? 같은 존재인 것 같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해석

우선 줄거리에서 살펴봤듯이 인간의 자연 파괴와 전쟁을 비판하는 듯하다.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들의 터전을 빼앗은 인간들 때문에 멧돼지가 재앙신이 되었고

마을에서 창과 총 등을 이용해서 전쟁한다는 걸 보면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 싶은지 알 수 있을듯하다.

감독의 철학

이 시대에는 여성이 철을 만지면 부정을 탄다고 여겼던 그런 시대인데 여자가 제철을 담당하고

모두 격리하고 소외 대상이었던 나병 환자들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더불어 살아가고.

남성에 비해 여성의 지위가 약했던 시대이지만 이 마을의 여성들은 노동과 병역들을 주도하며

최고 지도자인 에보시 고젠이 여성이라는 걸 보면 미야자키 감독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들의

생활공간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자연은 되돌려 준다

사슴신이라는 사슴 형상에 원숭이 얼굴을 한 사슴신이 나오는데

이 사슴신은 생명을 불어넣어 주기도 생명을 빼앗아 죽음으로 이르기도 하는데

사슴신이 인간들에 목이 잘려 죽자 분노에 찬 사슴신은 인간의 모든 것을 죽음에 빠뜨린다.

이로 봐서 우리 인간이 자연을 파괴한다면 언젠가는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의미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모노노케 히메는 인간 편도 자연의 편도 중립을 지키는 모습인데

인간과 자연이 적절한 타협만 이룬다면 공존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캐릭터인듯하다.

 

붉은돼지

<붉은 돼지>는 원래 일본 항공에서 기내 상영용으로 기획되었으나 장편으로 제작되면서 극장용으로 변경되었다. 일본에서는 일본 항공 국제선에서 먼저 상영되었고, 극장에서 개봉 한 후에도 기내 상영은 계속되었다.

원안은 월간지 ≪모델 그래픽스≫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잡상노트 비행정 시대의 이야기이다. 이와 관련해 미야자키 하야오가 날 것을 동경하고 이것을 그려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로, 주인공 캐릭터의 돼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을 나타낸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종종 자신의 모습을 돼지로 그리며 작품 해설집과 같은 곳에 등장한다.

애니메이션 시작 부분에서 작품의 내용을 알리는 <무엇일까> 화면이 등장하며 일본 TV 마스코트 캐릭터가 마치 수동 타자기로 타자를 치듯 “이 영화는 비행정 시대에 지중해를 무대로 하여 명예와 여인과 돈을 걸고 하늘의 해적과 싸워 ‘빨간 돼지’라 일컬어진 한 마리의 돼지의 이야기다.”라는 설명을 일본어, 이탈리아어, 한국어,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아랍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10개 언어로 보여준다.인간과 동물, 그리고 신(神)은 그들이 살아가는 터전인 자연을 두고 자연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아시타카는 끝까지 함께할 방법은 없는가 고민한다. 인간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연을 파괴하며 신은 자연이 파괴되지 않도록 지키고 싶어 한다.
전쟁에 대한 반대의 메시지를 전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 작품으로 1993년에 프랑스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상(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스토리
     
     
  영화는 이 극을 소개하는 여러 언어의 간략한 타이핑 문구로 시작된다. 그 중 번역이 아닌, 무려 원작에 나타난 한국어 문구는 이러하다. “이 영화는 비행정시대 지중해를 무대로 하여 여인과 명예와 돈을 걸고 하늘의 해적과 싸워 빨간 돼지라고 일컬어진 한 마리의 돼지의 이야기다” 영화가 서두에 직접 말해주는, 미야자키 감독이 뇌가 두부처럼 녹아버린 중년 남성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이 영화의 내용은 사실 이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타이핑 문구를 지나서 영화는 1929년, 이탈리아의 아드리안 해에는 ‘포르코 롯소’(이탈리아어로 porco는 돼지를 rosso는 붉다를 뜻한다)라는 이름의 현상금 사냥꾼을 비치며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과거 ‘마르코 파곳’이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공군 파이럿이었지만, 전쟁에서의 겪은 충격적인 경험과 환상적인 체험 이후 걸린 마법에 의해 돼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충격적인 체험이후 그가 직접 마법사를 찾아가 그의 모습을 돼지로 바꾸었다고도 전해진다) 그러한 그는 그의 뛰어난 비행술을 통해 빨간 비행정을 몰고 공적(하늘의 해적)들을 제압하며 현상금을 벌어 생활하고 있다. 이처럼 공군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현상금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주인공 포르코는 이 영화상에서 파시즘과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자국에 굉장히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며 무인도에 홀로 살고있다. 더군다나 극 중 그의 가족은 등장하지 않으며, 극의 등장인물 중 그의 과거를 이름과 모습을 온전하게 알고 있는 인물도 호텔 아드리아노의 여주인 ‘지나’와 과거의 전우 ‘페라린’ 뿐이다. 
한편, 비행술이 뛰어난 포르코에게 항상 노략질을 방해받던 공적들은 이 돼지를 처단하기 위해 슈나이더 컵 2년 연속 우승에 빛나는 미국인 파일럿 커티스를 고용한다. 고장 난 엔진을 수리하기 위해 밀라노의 공방을 찾아가던 주인공 포르코는 공적들의 사주를 받은 커티스의 기습에 의해 추락하게 된다. 하지만 순간적인 기지로 목숨과 자신의 부서진 비행정을 추려 밀라노의 공방에 도착한다. 
주인공은 밀라노 공방에서 장인 피콜로와 그의 손녀 ‘피오’를 만나게 되고, ‘피오’의 열정에 감복하여 그녀의 도안과 지도에 따라 비행정을 수리한다. 밀라노에서의 옛 전우 ‘페라린’과의 대화도 잠시, 포르코는 자신을 구속하려는 파시스트 정부를 피해서 급하게 몸을 피하게 된다. 그 과정에 비행기 조율을 위해 ‘피오’가 동행하게 되고, 전우 ‘페라린’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섬으로 무사히 돌아온다. 
그런데 무사히 돌아온 섬에는 공적들이 매복하고 있었고 그들은 포르코와 그의 비행정을 해치려한다. 이때 ‘피오’는 공적들에게 파일럿의 명예에 대해 이야기하며 포르코와 커티스의 정정당당한 승부를 제안하고, ‘피오’가 그들의 자존심을 자극한 덕에 피오의 도전제안이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렇게 포르코는 ‘피오’의 기지로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피할 수 없는 승부를 맞이하게 된다. 승부를 준비하던 밤, 포르코는 ‘피오’에게 돼지의 삶을 선택하게 된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피오’는 그날 밤 포르코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많은 이목이 집중된 승부에 날, 멋진 공중전에도 불구하고 비행전으로써는 그들의 승부가 갈리지 않게 되고, 난타전을 통해 승부는 유야무야 포르코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결말에 맞춰 ‘지나’는 자신의 비행정을 타고 날아와 이탈리아 공군이 포르코를 잡으러 쫓아왔다는 ‘페라린’의 무전을 전한다. 그렇게 ‘피오’는 ‘지나’의 비행기에 오르고, 포르코와 커티스는 공군을 유인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르며, 공적들 등 여타 모든 무리들도 그 자리에서 도망가게 되면서 사건은 또 유야무야 일단락된다. 신기하게도 이 순간 포르코는 영화 상에서 두 번째로 영웅 ‘마르코’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다. 영화는 이날 이후 ‘피오’의 나래이션을 통해 사건 이후에 ‘피오’와 ‘지나’가 친해진 이야기, 몇 차례의 전쟁과 종전, 승부 이후 커티스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포르코와 ‘지나’의 사랑의 사랑이 이루어 졌음을 은근하게 암시한다. 이후 영화는 완숙한 ‘지나’의 목소리로 불리우는 나긋한 향수(노스텔지어,鄕愁)의 노래를 거쳐 창공을 비행하는 붉은 비행정을 비친 후 막을 내린다.

배경 및 설정
     
앞선 글에서 나는 ‘지브리스럽다’라는 표현을 한 적 있다. 특히나 앞서 ‘천공의 성 라퓨타’를 나는 가장 지브리스럽지 않은 작품이라고 이야기한 적 있다. 만약 내게 지브리 전체 작품 중에서 지브리스러럽다고 생각하는 작품 세 개만을 꼽으라고 말한다면, 나는 반드시 이 작품 ‘붉은 돼지’를 그 중 하나로 꼽을 것이다. 이 작품이 대부분의 지브리 애니메이션처럼 소녀가 주인공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순수한 아이가 주인공이지도 않으며, 지브리의 가장 주요한 주제인 생태 및 에코페미니즘을 전면에 다루고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 작품은 ‘바람이 분다’와 더불어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 중 두 개 뿐인 명확한 현실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극의 배경은 1929년(첫 등장한 포르코가 읽고 있는 잡지 표기 기준)에 이탈리아 동부의 아드리안 해이다. 영화는 초기 단편으로 제작되었다가 장편영화로 재편되었는데, 제작당시 공교롭게도 소련과 인접한 아드리아 해에 군사적 소요사태가 있었다고 한다. 전쟁의 폭력성에 예민하고, 이성세계에서 핍박받아왔던 나약한 존재들에게 온 신경을 집중해왔던 미야지키 감독이 제작 당시 실제 전장이었던 아드리아 해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단순한 비행기 전투와 모험 이야기로 그려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좋은 의도만으로 좋은 작품이 탄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겠다.좋은 의도를 공감시키기 위해서는 그만큼 좋은 수단이 수반되어야만 하는 법이다. 반전(反戰), 여성주의, 정치적 올바름 등 좋은 의도를 전하는 열정에 과도하게 편중되어 영화적 개연성과 완결성이 결여되어 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 적지 않다) 서구의 아드리아 해를 배경으로 한 ‘붉은 돼지’는 특히나 지브리 마니아들과 서구인들에게 명작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서구에서 인정받는 서구 극인 ‘붉은 돼지’를 감독은 과연 가볍지 않은 자신만의 독특한 설정을 통해 안정감과 개연성을 구성한다.  

역설과 낭만
     
거듭 말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에 빠지게 하는 주요한 매력 중 하나는 관객이 도저히 함부로 가치평가 할 수 없는 역설적인 설정이다. 사실 관객들은 감독의 설정이 부자연스러우며, 그가 그려내는 세계가 사실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사실 모두 잘 알고 있다. 이 작품 이전부터 감독은 망해버린 세계에서 더럽혀진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말했고, 고고한 고대 문명이 스스로 추락하게 했다. 일본의 최고 경제 발전기에 시골의 목가적인 풍경을 그려냈는가 하면, 13살짜리 소녀로 남성 시민이 중심이었던 근대의 정수(낭만주의)를 그려내기도 했다. 그는 항상 이렇게 우리에게 다소 낯설고, 미묘하게 부자연스러운 설정으로 자신이 작품을 구성한다. 당연히 이 작품에도 마찬가지로 감독 특유의 독특한 설정이 도드라진다. 더욱이 이 작품은 그 모순 자체가 주제로 보인다. 굉장히 단순하고, 이렇다 할 특징과 거부감 없이 무난한 구도의 스토리로 진행됨에도 말이다.

돼지와 실존주의
     
이 영화에서 내게 감독의 드라마틱하고 유려한 역설이 도드라졌던 포인트 중 하나는 바로 돼지였다. 이 영화의 주인공 돼지(포르코 및 부타).
이 영화의 주인공은 돼지의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극 중 인물들, 특히 주인공과 대립관계에 있는 인물들은 주인공을 조롱한 듯 돼지(부타)라고 부른다. 주인공과 친한 인물들 마저도 모두 주인공을 개명한 이름인 포르코(이탈리아어로 돼지)라 부르니, 결국 그는 극 중 모두에게 계속이 돼지라고 불리는 것이다. 물론 주인공 주위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이 돼지라는 칭호를 긍정적인 이름으로 여기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정작 극 중 주인공의 태도를 보면, 그는 자신이 사는 돼지의 삶을 저주나 비참한 상태로 여기지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극 중 주인공은 약간은 즐거운 듯, 자조적으로 또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돼지라고 칭한다. 왜 이 영화의 주인공 포르코(돼지)는 하필 돼지가 되었을까? 
단언하건대, 그건 감독 이외에 그 누구도 확언할 수가 없다. 이에관한 모든 확언은 오만이다. 다만, 그러니 왜 그 설정이 내게 기괴하고 또 흥미로웠는지만 이야기해 보려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영국의 질적 공리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쾌락의 질을 설명하면서, 서구 정신세계의 한 기둥인 그리스 문화의 대표 소크라테스와 정 반대에 있는 대상으로 돼지를 선택했다. 돼지에 대한 이미지는 서구와 우리가 크게 다르지는 않은 모양이다. 우리가 사람을 돼지라고 부를 때는 어떤 경우인가? 일차적으론 뚱뚱한 사람에게 돼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기초대사량이 굉장히 큰 동물이기에, 사람이 돼지처럼 살이 찌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열량을 먹고 움직이지 않아야한다. ‘일을 하지 않는다!’ 산업사회에서 노동을 하지 않는 존재는, 노동과 거리가 있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존재거나 아니면 무가치한 존재이다. ‘착실, 성실'하지 않고 일하지 않는 존재, 그것이 우리가 조롱하는 돼지라는 이미지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한편, 우리기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시니컬하다라는 말이 있다. 개를 뜻하는 그리스 어에 시닉에 근원을 둔 시닉컬(cinical)하다는 말은 개 같다는 말이요, 개같이 살았던 견유학파와 같다는 말이다. 알렉센더 왕 앞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왕의 물음에, 햇빛이나 가리지 말라고 말했던 디오게네스가 대표적인 견유학파 철학자이다. 그렇게 세상 만사를 달관한 태도가 시니컬한 태도, 견유학파 같은 태도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시니컬하다는 언어를 남발하고, 디오게네스의 이야기를 전설처럼 되뇌이면서 이 괴짜들을 기억해 주고 있는 걸까? 현실과 동떨어져서 개처럼 살라고 말하며, 집도 없이 길바닥 통 속에 몸을 집어넣고 살아가던 이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 지금의 우리가 사실 우리도 모르게 조금씩은 세상의 질서와 욕구를 따르지 않고 세상의 기준에서 개처럼, 돼지처럼 살아가는 낭만에 대한 동경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돼지는 신체구조 상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땅만을 쳐다본다. 그러한 돼지는 시력마저도 굉장히 낮아 말 그대로 근시안적인 시야만을 가지고 있다. 또한 돼지는 온갖 것을 가리지 않고 잘 먹고 살을 찌우며, 축축하고 더러운 곳에서도 잘 지낸다. 이러한 돼지는 노동력을 얻기 위해서보다는 고기를 위한 용도로 주로 쓰이는 가축이다. 그래서 물질 생산이 중요한 가치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생산 활동을 하지 않고, 자신의 질 낮은 쾌락에 집중하는 이들을 우리는 흔히 돼지라고 부른다. 이 극에서 주인공을 부르는 ‘돼지’라는 칭호에도 당연히 그러한 부정적인 맥락의 섞여있다. 더욱이 주인공 자신마저도 “스파이는 착실한 녀석이나 하는 것”이라든지, 자신의 따라오려는 피오에게 “너는 착실 아이지 않냐”며 만류하는 장면 등을 통해 ‘착실함’과 자신(돼지)을 자주 대비시킨다. 

 

무인도와 오브제들
   

무인도
     
극 중 파시스트 정당이 집권한 이탈리아는 민족과 애국의 이름으로 온갖 수단을 전쟁에 동원시키려는 잔인한 야욕에 잠겨있다. 이 상황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그려지는 왕국과 거의 같아 보인다. 낭만적인 돼지 포르코는 이 광기어린 조국을 피해서 말 그대로 바다 한 가운데에서 낭만적인(파도 가운데 홀로 있는) 무인도에 살고 있다. 포르코 롯소, 붉은 돼지로서 자신의 삶을 선택한 주인공은 국가와도, 친구와도, 가족과도 거리를 두고 홀로 살아간다. 그런데, 막상 그의 피난처이자 안식처인 무인도에 벌려진 감독의 연출을 보면 주인공이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나 염세주의자(페시미스트), 허무주의자(니힐리스트)로 보이지 않는다.(단적으로 그의 비행정도 이탈리아 국기로 장식되어있지 않은가?)
뭐랄까, 그의 거처는 마치 강압적인 부모님께 반항하는 청소년의 방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포르코와 그의 섬, 비행기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하울과 그의 성을 닮았다. 다만, 하울이 자신의 존재론적 근원을 모른 채 방황하는 소년이라면, 중년의 붉은 돼지는 자신의 이름을 자신이 직접 정하고 자신의 삶을 정한 소년이다. 물론 둘다 나약하고 유치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최대 매력이다.
그러한 그의 거처는 영화와 비행정을 사랑하고, 간섭받기 싫어하는 낭만적인 사춘기 소년의 공간으로 보인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주인공의 섬은, 여타 지브리의 영화들이 그러했듯, 주인공의 특성과 영화의 주제의식을 정말 압축적으로 연출된 듯 보였다.

 

 


     책상과 의자 그리고 집시의 담배
    

  대부분의 동물은 누워서 쉬고, 서서 일한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노동하는 인간은 서서 힘들여 일하고, 누워서 편하게 쉰다. 그런데, 의자에 앉는 행위는 굉장히 어중간한 행위이다. 의자에 앉은 상태는 서 있는 것만큼 온전히 노동하기 좋은 상태도 아니며, 그렇다고 온전히 쉬기 좋은 상태도 아니다. 그래서 의자에 앉는 행위는 ‘자연스럽지’않은 행위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의자는 굉장히 인간적인 오브제이다. 인간만이 의자를 만들어 의자를 통해 어중간한 상태에 접어든다. 의자에 앉아서 행하는 행위들도 굉장히 인간적인 행위들이다. 특히 책상과 함께 의자에 앉은 인간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 여겨지는 언어능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의자는 자연과 신에서도 벗어난, 근대적 인간의 상징으로 자주 이용된다. 대표적으로 빈센트 반 고흐의 유명 작품 ‘부재’에는 텅 빈 의자에 고흐가 자주 피웠던 담배파이프가 놓여있다. 그 의자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근대인인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빈세트 반 고흐 <부재>


이 작품은 ‘붉은 돼지(紅の豚,)’라는 붉은 문구로 극을 시작하자마자 무인도에 책상과 의자를 두고 졸고 있는 주인공을 비친다. 그림 ‘부재’에서의 고흐와 달리 무인도에서 주인공은 부재중인 상황이 아니다. 근대의 낭만이라는 정수가 응축된 주인공 돼지(포르코)는 그 섬에 실존하고 있다. 그는 졸고 있으면서도 구태어 바닥에 눕지 않고, 많은 예술작품에서 인간성을 대표하는 상징물인 책상과 의자에 기대고 있다. 심지어 그는 얼굴을 mare blue(푸른 바다), cinema 1929라 쓰여있는 잡지(언어)로 덮고 있다. 
고흐의 작품 ‘부재’에선 고흐는 부재하고 의자 위에 그의 담배 파이프뿐이 없지만, 이 작품에서 실존하는 주인공은 책상 위 담배, 성냥과 함께한다. 또한 극 중 주인공이 항상 피는 담배에는 GITANES, 즉 집시라는 글자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춤을 추며 돌아다니는 집시가. 
집시라는 이름의 담배. 그는 이 담배를 필 때마다, 유대인들보다 나치(전체주의)에게 더 심각하게 학살당했던,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자유로운 집시들의 향기를 마시는 것이 아닐까? 


라디오와 전화기

     
거듭 말하지만, 내 눈에 주인공 포르코는 염세주의자도, 허무주의자도 아닌 것 같다. 구태어 말하자면 낭만주의자(로맨티스트)랄까? 극의 시작과 함께 비치는 그의 무인도는 결코 소통이 사라진 곳이 아니다. 그는 그의 붉은 비행기로 언제든지 섬 밖을 오고갈 수 있다. 더욱이 그는 책상 위의 진공관 앰프 라디오는 문명 세상의 전파를 받아 재생되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또한 그 덩그런히 위치한 무인도에 무려 전화도 연결되어있다. 일차적으로 전화는 붉은 돼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돈을 버는 수단이지만, 그것은 분명히 무인도에 사는 그를 외부와 언어적으로 연결시켜주는 대상이다.
     
우산
     
주인공의 덩그런한 무인도에는 또 굉장히 덩그런하게 우산이 장대에 묶여 설치되어 있다. 심지어 그 우산은 해변용 파라솔도 아닌, 손잡이까지 달린 검정색 우산이다. 포르코는 그 우산을 구태어 묶어서 파라솔처럼 쓰고 있다. ‘이웃집 토토로’편에서 말했듯, 우산은 굉장히 문명적인 도구이다. 하늘이 비를 뿌려서 인간에게 이동을 허락하지 않을 때, 인간은 우산을 통해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하늘을 제한한다. 우산을 펴고 세상을 걷는 사람은, 거대한 하늘의 의지를 뚫고서 자신이 통제한 자기만의 하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비롯 그것이 작고 나약하더라도 말이다. 문명을 벗어나 무인도에서 홀로 살고, 파시즘이 팽배한 국가에서 몸을 피해 돼지의 삶을 선택한 주인공에서 덩그런한 검정색 우산은 그의 낭만을 잘 표현해주는 소품으로 보였다.
   



비행
   


이 영화의 포스터, 예고편만 보아도 누구나 단박에 알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비행과 비행정이 아주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비행이 중요하지 않은 작품이 단 하나라도 있었냐만은, 내겐 그 중에서도 유난하게 ‘마녀배달부 키키’와 이 작품 ‘붉은 돼지’에서 비행은 주인공의 낭만적인 특성을 강조하는 중요한 요소로 보였다. 특히 비행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체력이나 집중력 따위가 아니라 영감이라고 강조하는 포르코의 대사에서 비행과 비행정에 대한 남다른 자의식 과잉과 애착이 엿보인다. 
    

비행정
    

이 영화의 비행정으로써 굉장히 낭만적인 이미지를 구체화한다. 비행정은 물에서 이륙하여 하늘을 나는 비행기이다. 바다가 파란 이유는 파란 하늘을 비치기 있기 때문이니, 바다를 헤치고 하늘을 나는 비행정은 하늘을 항해하는 배인 것이다. 극 중 ‘피오’는 피행정의 파일럿들은 바다와 하늘이 마음을 씻어주어 선원들보다 용감하고, 일반 비행기의 파일럿들보다 긍지가 높다고 말한다. “마녀배달부 키키”에서 톰보와 비행선장이 키키를 동경했듯, 이 영화에서 ‘지나’와 ‘피오’ 두 여성은 하늘을 나는 파일럿들을 동경한다.(지나는 파일럿과 세 번이나 결혼하고 또 파일럿인 포르코를 사랑하지 않는가? 이런 지나와 피오가 친구가 된 것은 자연스럽다.)

한편.... 왜 많은 남성들은 자동차와 시계에 왜 그토록 집착할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서구의 주류(남성들)에게 자동차, 시계, 엔진 등의 기계장치들은 이성적 인간이 정교하게 빚어낸 인간적인 아름다움의 정수로 여겨졌고 그 이미지는 몇 차례고 계속이 덧대어져 강화됐다. 그리고 그 이미지의 정점에 비행기가 있었다. 비행기는 온갖 과학과 공학의 산물이었고, 이성과 지식을 이용한 그 산물의 힘은 신의 영역이었던 하늘에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닿을 수 있게 해주는 자치였다. 그래서 아직도 정교함 및 이성적 능력과 관련된 기계장치들의 이미지는 관례처럼 비행기를 이미지를 담고있다. 
지금도 많은 수 많은 남성 시계 브랜드들이 아직도 비행기 광고를 통해 제품의 이미지를 홍보한다. 자동차는 말할 것도 없다. 고급 자동차 디자인의 역사는 비행기 모방의 역사라고 바꾸어 말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늘을 나는 거대하고 시끄러운 물건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매력적이지만, 특히나 남성들에게 이성적인 힘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비행기만큼 매력적인 대상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우아한 맥락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비행기를 정말로 사랑한다. 그리고 그는 항상 그의 사랑을 자신의 작품에 투사해왔다. (그래서 내게 '바람이 분다'는 시종일관 감독의 비행에 대한 사랑을 간증하는 영화로 보였다.) 하지만, 이성 중심의 모더니즘의 세계는 그곳에 속하지 못한 교육받지 못한 자, 노동자, 타 문명의 사람들을 배제했고 그 결과는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특히 세계대전에서 비행기는 인명살상과 가장 밀접한, 가장 중요한 전략무기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앞서도 역설했듯,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비행기는 그의 작품에 치명적인 모순을 안겨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자신의 작품에서 주창해오던 가치, 포스트 모더니즘의 맥락에서 여성과 자연, 어린아이, 생명에 한없는 긍정의 찬사와 이성적이고 폭력적인 비행기의 이미지가 너무도 강하게 상충하기 때문이다. 
감독 본인도 분명히 그 상충의 불편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너무도 비행기를 사랑한다. 이 두 가지의 상충하는 이미지의, 확실하게 선을 그을 수 없는 모순은 그의 이 작품에서 시작되어 이 작품의 11년뒤 개봉하는 ‘바람이 분다’까지도 이어진다. (슬프게도 이 모순이 '바람이 분다'가 저평가 받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는 그 불편한 상충의 이미지를 관객에게 전달하지 않기 위해서 인지, 비행정을 정식으로 모는 인물들은 비현실적인 괴짜들이고, 노략질과 기관총이 난무하는 사건사고들 가운데에도 영화의 분위기가 비현실적으로 즐겁고 밝다. 심지어 작품은 최고의 비생술(살상능력)을 가진 돼지 얼굴의 주인공을 통해 전쟁을 통렬하게 반대하기에 이른다. 
이 기괴함은 차라리 비꼼으로도 보인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작품에서 비행정은 주인공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네 친구와 비행기를 만들었고, 하늘을 나는 일에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부여한다. 위험한 비행을 걱정하는 ‘지나’의 만류에 “하늘을 날지 않는 돼지는 그저 돼지일 뿐이야”라는 대사로 대답한다. 정교한 공학의 근원인 영감(Inspiration)과 오랜 훈련으로 갈고닦은 비생술 경험. 이 두 가지의 힘이 돼지에게 선사하는 자유는 금기였던 하늘을 헤치고 자유롭게 항해해 낭만하는 자유였다. 주인공은 1910년에, 그의 나이 17살에 홀로 비행기를 몰아 비행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는 사랑스러운 친구 ‘지나’를 태우고 얼굴을 붉히며 비행을 하던 그 소년시절로만을 평생을 살기위해 배행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한편 근대 기술문명의 산물인 비행기의 필연적 운명은 효과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다. 주인공은 비행을 사랑했지만, 전쟁의 폭력과 광기에 엉킨 비행을 해야만 했다. 적지 않은 전우들도 만난 것 같지만, 또 많은 친구를 하늘에서 잃었다. 이 모순을 반항과 투정으로 해결하기 위해 극은 이 주인공을 돼지로 만들어 버렸나 보다. 
전쟁 영웅 마르코 대위는 폭풍치는 바다에서 적군까지 구했다고 한다. 그것은 어리석은 반역행위인지도 모른다. (피오는 이 이야기가 너무 좋았다고 한다) 전쟁의 막바지에 서로를 죽이기 위해 비행하던 파일럿들이 자신의 비행기를 타고 하나의 흐름으로 구름처럼 흘러가는 환상적인 광경을 체험한 주인공은 적군을 구하는 비합리적인 삶, 비싼 비행정을 겨우겨우 운행하고 있지만 국가의 스폰을 받지 않고 사는 삐딱한 돼지의 삶을 살기로 한다.
이처럼 포르코는 전체주의와 전쟁에 광기에 잠긴 국가를 피해 돼지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하늘을 나는 이성적이며 신사적인 행위만큼은 포기할 수가 없다. 주인공은 돼지의 얼굴로 하늘을 날고 있지만 비행정 시대의 근대 신사의 모습을 엄격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는 그의 비행정에 오를 때면 항공 점퍼에 항상 깨끗한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다. 하얀 장갑도 결코 잊지 않는다.  
이처럼 포르코를 중심으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비행은 너무도 모순되었고, 기괴하다. 여기서 비행은 자유의 의지와 죽음의 공포가 공존하며, 국가주의가 몰아붙인 폭력과 만인을 아우르는 하늘에 대한 열망이 공존하고 있다. 

 

붉은 돼지
     
이 영화의 주인공 포르코 롯소(붉은 돼지)의 원래 이름은 ‘마르코 파곳’이었다고 한다.(포르코 롯소와 나름 단어를 맞춘 것 같다.) 마르코는 예수의 12사도 중 가장 오래된 복음서의 저자 이름이다. 그 유명한 ‘마르코 폴로’로도 우리에게 알려진 이 이름은 라틴계에서 굉장히 흔한 이름이다. 주인공도 그 사회에서 흔했던 그 이름으로 자신의 사회에서 인정받고 존중받는 그 영웅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이름을, 자신의 삶을 버리고 붉은 돼지라는 이름과 돼지의 삶을 선택한다. 그는 그 선택에 한 점의 미련도 없는 것 같다.(그래선지 36세 정도에 나이임에도, 50대 정도의 과장된 언행으로 행동한다.) 심지어 세상에 단 한 장 남아있는 사진의 그 얼굴마저 펜으로 그어져있는데, 주인공은 그나마도 보기 싫은 모양이다. 
다만, 그에게 남은 단 하나의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기계를 가장 뛰어나게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결코 그 기계를 통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그는 살상력 높은 소이탄이나 철갑탄도 마다한다. 전쟁은 싫고 상금벌이용 화력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대장간 꼬마도 이해 못하는 말도 안 되는 억지요 자기중심적인 작위적 고집이다.
그래서 멋지다.

극에선 마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처럼, 잠시의 착각처럼,  주인공이 돼지에 모습에서 잠시 본래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오곤 한다. ‘지나’가 바랐던, 포르코의 마법을 푸는 법은 영화에 정확하기 드러나진 않는다. 일단 ‘피오’의 입맞춤에도 얼굴만 불그렇게 변한걸 보면 적어도 그 열쇠가 입맞춤은 아닌 것 같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인공이 어떻게 돼지가 되었는지조차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으니, 관객의 입장에서 어떻게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저 앞 뒤 맥락만을 살펴볼 뿐이다.
포르코는 직접 17세에 첫 단독비행을 했다고 하니, 그는 10대의 어린 나이 때부터 비행을 위해 살아왔다. 그러다 그는 전쟁의 마지막 해 공중전에서 친구를 잃고, 죽음의 위기에서 구름을 뚫고 만국의 죽은 비행기 조종사들이 은하수처럼 하늘로 날아가는 신비한 장면을 체험한다. (마치 발키리에 의해 발할라로 인도되는 중인 전사들의 행렬을 보는 듯하다.) 그 뒤로 돼지의 삶을 선택한 주인공의 비행에는 명확한 목적이 없다. 착실한 세상의 관점에서 애국을 위해, 전우를 위해 하늘을 날던 공군영웅 마르코의 비행에 비하자면, 붉은 돼지의 비행은 무의미하고 나태하다. 애둘러 말하면, 그의 정체성인 비행 그 자체가 그의 비행의 목적이라 할까? 그는 비행으로 그저 돈이나 몇 푼 벌어 생활비와 비행기 유지비를 벌면 그만인 것이다. 그의 말 그대로 그는 비행기와 함께 돼지의 삶을 산다. 그의 비행은 분명 낭만이지만, 그 헤엄침에는 목적지가 없었다. 
그러다 포르코는 ‘피오’를 매개로 커티스와의 피할 수 없는 대결에 놓인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는 ‘피오’를 지켜야 한다는 명확한 목표가 생겼다. 그의 낭만적 비행에 목표가 생겼다. 그렇게 커티스와의 대결을 준비하는 포르크는 밤 중 이제야 돼지의 비행이 아닌, 명확한 목표가 있는 비행을 진지하게 준비하게 된다. 그 순간 ‘피오’의 눈에 포르코의 모습이 마르코의 모습으로 잠시 돌아온다. 
또한 커티스와의 대결 중에 주인공은 ‘지나’가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게 된다. 이후 ‘지나’가 등장하게 되고, ‘지나’와 ‘피오’의 대피를 위해 비행기에 오른다. 그 순간, 즉 ‘지나’라는 비행의 목표가 생기자 커티스의 눈에 포르코의 얼굴이 바뀌게 된다.(이후로 피오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하니, 아마 얼굴이 온전하게 돌아왔는 지도 모르겠다. 결국 디즈니스럽게도 마법을 푸는 것은 사랑인가?)

 

피오 피콜로
     
     
피오는 피콜로 영감의 손녀이다. 피콜로는 이탈리아어로 ‘작은’이라는 뜻이다. 과연 피콜로사의 주인은 작은 할아버지이다. 이성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계를 생산하던 공방에, 크고 건강했던 남성은 없고 작은 노인 하나만 남았다. 피콜로사의 그 빈 자리들을 여성들이 매우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피오’가 있다. 
사실 내 눈엔 피오가 이 영화의 사실상의 진짜 주인공으로 보였다. 귀여운 외모의 그녀는 생기 넘치는 붉은 생머리를 뒤로 묶고 있다. 그녀는 설계와 공학에 능하고, 무기를 들고 있는 공적들 앞에서도 두려움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비행정 파일럿의 자존심을 이야기하여 대결을 이끌어내는 기지를 발휘할 만큼 용감하기도 하다. 그녀는 하늘을 나는 파일럿들을 동경하며, 나중에는 제트 엔진이 달린 비행기를 타고 독립비행을 하기도 한다. 비행을 동경하지만 적군까지 구했다는 마르코의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니, 그녀가 생명을 해치는 비행을 좋아할 리 만무하다. 심지어 (의도치 않게) 그녀는 그녀의 보기보다 크다는 엉덩이로 포르코의 기관총(포르코의 유일한 폭력)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처음 포르코는 그녀의 나이와 외모를 보고 잠시 편견으로 그녀를 대하지만, 그녀 작업과 기지를 보고나서 그녀를 ‘피콜로 정비소의 설계주임’으로 인정해준다. 
‘피오’는 극 중 포르코의 악수를 받아낸 유일한 존재이다. 포르코는 ‘피오’와 섬에 돌아와 공정들 앞에서 명실상부한 그녀의 가치를 선포한 후 운명공동체가 된 ‘피오’에게 악수를 청한다. 악수는 무장해제와 상호 인정의 스킨쉽이다. 그래서 목숨을 건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공적들은 포르코와 커티스에게 상호 악수를 청했을 때, 포르코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폭력성을 포장하는 위선이고, 가식이다. 그래서 포르코는 자신이 결벽증이 있다며 그 위선을 거부한다. 그는 위선적인 적이 아니라, 자신이 인정한 자신의 동료에게 진지한 악수를 청한다. 유치하지만, 생명을 존중하고 낭만적인 돼지로서의 삶을 선택한 포르코를, 그리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었던 성인남성 포르코가 소녀 ‘피오’는 적잖이 맘에 들었나보다. 비록 그가 돼지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지나
     
사실 ‘지나’는 소년 만화에서 굉장히 전형적인 캐릭터이다. 모든 남성 캐릭터들이 사랑하는 뛰어난 배경과 외모를 가진 여성캐릭터. 또한 ‘지나’는 전형적이게도 주인공만을 사랑하는 지고지순한 캐릭터이다. 그녀는 이 극의 중심이며, 제멋대로이고 자기중심적인 주인공의 행동을 날카롭게 짚어내는 역할도 맡고 있지만 그 매력들이 이 캐릭터의 전형성이 야기하는 고루함을 넘을 만큼 매력적이지는 못했다. 다만, 마지막 엔딩 크레딧과 함께 그녀의 목소리로 불리는 ost가 주는 감정선은 내가 끝이라는 문구를 보고도 한참을 검은 화면을 쳐다보게 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페라린
     
페라린은 포르코가 군인이던 시절의 전우이다. 30대 중반정도의 젊은 나이에 소령에 오른 것을 보면, 전쟁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나보다. 그는 음으로 양으로 포르코를 돕기 위해 애쓰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포르코가 군으로 다시 돌아와 착실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물론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포르코가 아드리아 해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유도해준 인물로 페라린이었고, 영화 후반에 포르코에게 경고무전을 보내준 이도 ‘페라린’이었다. 그럼에도 페라린이 직접 등장하는 장면은 포르코와 극장에서 대화하는 장면이 거의 전부이다. 그런데, 페라린과 포르코가 대화하는 극장 장면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인 것 같다.
포르코는 군인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돼지로서의 삶을 선택했지만, 페라린은 군대에 남아 국가를 스폰서로 군인으로서의 비행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돼지의 삶, 곧 국가와 사회의 지시를 결코 따르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을 걱정하며, 다시금 군으로 돌아올 것을 회유한다. 포르코는 “파시스트보다는 돼지의 삶이 낫다”며 페라린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한다. 
그 이야기 도중 극장에는 비행기를 탄 돼지가 쥐에게 비행전과 주먹싸움에서도 모두 패배하는 영화(이후에 이 구도가 그대로 주인공에게도 벌어진다.)가 상영되고 있다. 페라린의 억지로 이야기 하듯 그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말한다. 포르코는 끔찍하다고 하지만.





p.s.1 일종에 이스터에그다. 이탈리아 기블리의 엔진, 곧 지브리의 엔진.

p.s.2 극중 등장하는 맘마 유토단, 이탈리아어 맘마 유토는 어머니의 보살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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